
세계 최고 수준의 내구 레이스 르망 24시가 열리는 프랑스 사르트 서킷에서 지난 6월, 액체수소를 연료로 쓰는 레이싱 프로토타입이 세계 최초로 공개 주행을 선보였다.
토요타 자동차의 ‘TR LH2 Racing Prototype’이다.
수소 엔진 특유의 날카로운 고음이 총길이 13.6km 코스에 울려 퍼지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장면은 단순한 모터스포츠 뉴스가 아니다.
“EV 전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외쳐온 유럽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의 연장선에 있는 수소 기술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순간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약 5년에 걸친 도요타의 꾸준한 기술 개발과 규칙을 바꾸기 위한 전략적 준비가 있었다.
EV 버블이 꺼지는 현실
2024년을 돌아보면 유럽 EV 시장은 분명한 전환점을 맞았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 ACEA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유럽, EFTA와 영국을 포함한 승용차 전체 판매량은 전년 대비 0.9% 증가한 1296만 대였다. 하지만 순수전기차인 BEV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반면 하이브리드차는 전년 대비 19.6% 증가하며 큰 폭의 성장세를 보였다.
독일에서는 2023년 말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이 최대 9000유로가 갑작스럽게 중단되면서 판매량이 전년 대비 크게 줄었다.
유럽 주요 자동차 업체들도 어려움에 직면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20년대 말까지 모든 차량을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사실상 철회했고, 볼보 역시 2030년 전기차 100% 계획을 수정했다.
마루베니경제연구소의 2025년 4월 보고서는 “전기차 판매 부진을 계기로 유럽 업체를 중심으로 전기차 전환 목표를 낮추고, PHEV와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확대하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충전 인프라 정비 지연, 긴 충전 시간, 배터리 잔존가치 문제. 소비자가 실제로 마주한 이 과제들은 정책 입안자들이 그렸던 깔끔한 로드맵과는 크게 달랐다.
에너지정책 연구가 사에키 도시야는 “전기차는 중요한 선택지 중 하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사용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지역별 에너지 여건과 사회 인프라를 무시한 단일 기술로의 수렴은 경제적·사회적 리스크를 초래한다"고 밝혔다.
“적은 것은 탄소지, 적은 것은 내연기관이 아니다”라는 철학
토요타가 수소 엔진 연구개발을 모터스포츠 무대로 가져온 것은 2021년 5월이었다.
토요타는 일본 슈퍼 다이큐 시리즈 후지 24시간 레이스에 수소 엔진을 탑재한 ‘ORC ROOKIE GR Corolla H2 Concept’를 투입했다. 당시 토요타 아키오 사장, 현재 회장은 드라이버 ‘모리조’로 직접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목표는 분명했다. “적은 탄소이지 내연기관이 아니다.”
토요타 회장이 반복해서 말한 이 문장은 유럽 언론과 일부 환경단체로부터 전기차 전환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
“토요타는 EV 전환에 뒤처졌다”, “갈라파고스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토요타 회장의 생각에는 일관된 경영 논리가 있었다.
“탄소중립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에너지입니다. 현재 지역마다 에너지 사정은 크게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과 각 지역의 어떤 상황, 어떤 요구에도 대응하고,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당시 토요타 아키오 사장의 말이다.
이 전방위 전략, 즉 멀티패스웨이는 하이브리드차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차세대 기술 연구개발에 계속 투자하는 경영 구조와 맞물려 있었다.
하이브리드차 시장에서의 압도적 우위는 이후 토요타의 실적으로 직결됐다. 2024년 3월기 연결 영업이익은 약 5조3000억 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기차 전용 전략으로 방향을 잡은 경쟁사들과는 대조적으로 강한 재무 기반을 보여준 셈이다.
'슈퍼 다이큐에서 쌓은 실적'이라는 외교 카드
토요타의 수소 엔진 개발은 레이스 현장에서 실제 주행을 거치며 빠르게 진화했다.
2021년 기체수소로 시작한 슈퍼 다이큐 참전은 2023년 액체수소 사양으로 전환됐다. 액체수소는 기체수소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아 장거리·고출력 레이스에 더 적합하다.
이 현장 검증이 르망 주최 단체인 ACO와의 협상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2023년 5월 후지 24시간 레이스 현장에는 ACO의 피에르 피용 회장이 일본을 찾았다. 그는 토요타, 마쓰다, 슈퍼 다이큐 기구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리고 업계를 놀라게 한 결정이 나왔다.
르망 24시는 2028년부터 수소 엔진 차량의 톱 카테고리 참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올해, 2026년에는 도요타의 WEC 참전 차량 ‘TR010 HYBRID’와 같은 섀시를 바탕으로 개발한 ‘TR LH2 Racing Prototype’이 르망 본 코스에서 세계 최초로 시범 주행을 실시했다.
이는 단순한 쇼가 아니다. 2028년 정식 참전을 향한 기술 검증을 실제 무대에 올린 것이다.
주목할 점은 ACO가 이 과정에서 보인 태도다.
“무엇이 최선의 기술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피용 회장의 이 말은 특정 기술에 치우치지 않고 경쟁과 실증을 통해 최적의 해답을 찾겠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토요타가 5년에 걸쳐 쌓은 주행 데이터와 안전 실적이 이 열린 무대를 끌어낸 원동력이었다.
유럽 업체들이 일본 슈퍼 다이큐를 찾기 시작한 이유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유럽 업체들의 움직임이다.
프랑스 명문 팀 알핀도 수소 레이싱카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알핀의 치프 엔지니어 피에르 장 타르디 씨는 2024년 이렇게 말했다.
“수소 관련 기술과 실전 경험은 토요타와 일본이 무엇보다 앞서 있다. 그들은 지식과 조언을 제공하는 데 매우 열려 있다. 레이스 트랙 위에서는 물론 라이벌이지만, 수소로 스포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 목표를 갖고 있다. 그 부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더 나아가 르망 주최자인 ACO의 피용 회장과 유럽 제조사 실무자들이 일본 슈퍼 다이큐 시리즈를 시찰하러 오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때 유럽 규제가 일본차를 뒤처진 기술로 규정하고, EV 전환의 맥락에서 토요타를 비판하던 구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FIA의 수소 관련 워킹그룹에는 현재 적어도 8개 이상의 제조사가 참여하고 있다. ACO는 2029년까지 여러 수소 차량 제조사가 르망에 참전할 것으로 보고 있다.
비즈니스 리더가 배워야 할 ‘룰메이킹’의 논리
이번 흐름이 보여주는 교훈은 자동차 산업을 넘어 비즈니스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트렌드에 올라타지 않는 것의 비용과 리스크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점이다.
EV 단일화를 선언한 유럽 제조사들은 시장 수요 구조 변화와 정책 후퇴라는 이중 타격을 받았다. 반면 토요타는 지금의 정답이 아니라 에너지 사정과 고객 요구의 다양성이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여러 선택지를 버리지 않았다.
둘째, 현장에서의 실증이 국제 표준 협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토요타가 수소 엔진 차량을 처음 슈퍼 다이큐에 투입했을 때, 그 의미가 국제적 룰 형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본 관계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5년간의 주행 데이터와 안전 실적 축적이 ACO를 움직였고, 유럽 제조사들을 기술 협력의 테이블로 끌어냈다. 로비가 아니라 실적으로 만든 사실의 외교였다.
셋째, 경쟁자를 룰의 공동 설계자로 바꾸는 시각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알핀과의 관계는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는 코피티션의 좋은 사례다. 수소 기술 보급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지식을 나누면서, 레이스 트랙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 토요타의 수소 전략을 단순한 자사 개발에서 업계 표준 형성으로 끌어올렸다.
‘긴 안목’의 전략
액체수소 하이퍼카가 사르트 서킷을 달린 것은 토요타의 완전한 승리 선언은 아니다.
2028년 르망 정식 참전을 위해서는 액체수소 공급 인프라 정비, 탱크 경량화, 에너지 밀도 향상 등 아직 해결해야 할 기술 과제가 많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갖는 상징성은 크다.
EV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을 넘어, 무엇을 에너지원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내연기관 기술 자산을 미래 탈탄소 사회와 연결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EV 전환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전방위 전략을 고수한 토요타의 선택은 앞으로도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특정 기술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지 시장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유행에 즉시 올라타는 민첩성만이 아니다.
변화의 본질을 읽고, 자사의 강점을 살린 승리의 길을 장기적으로 설계하는 구상력.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실행하는 배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