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최대 화력발전 사업자인 JERA가 6월 22일 대형 계획을 공개했다. 미국 중부에 원자력발전소 1기와 맞먹는 130만 kW급 대형 가스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고,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직접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투자 규모는 약 5조 원으로 추정된다. 일본 발전 사업자가 미국에서 데이터센터와 연계한 발전소를 개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 최첨단 AI 데이터센터가 화력발전소 옆에 들어서는 것일까. 이 질문은 생성형 AI 경쟁의 본질을 보여준다.
알고리즘이나 반도체, GPU 성능을 겨루는 시대를 넘어, 이제는 얼마나 안정적으로 전력을 확보하느냐가 AI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JERA의 움직임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사례다.
■ 송전망을 거치지 않는 새로운 방식
기존 데이터센터에 대한 전력 공급은 통상 '발전소→송전망→데이터센터'라는 흐름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송전망 용량 부족과 다른 산업과의 전력 확보 경쟁이라는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는 수도권 변전소 접속 대기 기간이 길어지며, 일부에서는 전력 확보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대형 전력회사들은 2026년 이후 오사카 지역 변전소 업그레이드와 수도권 송전망 확장에 1조 5천억 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지만,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데이터센터가 몰린 버지니아주, 조지아주, 텍사스주 등에서는 국지적인 전력 수급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JERA가 채택하려는 방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모델이다. 발전소 부지 안에 데이터센터를 함께 조성하고, 송전망을 거치지 않은 채 전기를 직접 공급하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이를 비하인드 더 미터 방식이라고 부른다.
이 방식은 송전 손실을 줄이고, 접속 공사 대기 시간을 없앨 수 있다. 인프라 구축 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안정성도 높아진다.
JERA는 데이터센터 사업자와 온사이트 전력구매계약을 맺는 사업 모델도 염두에 두고 있다. 단순히 전기만 파는 것이 아니라 전력, 토지, 냉각 인프라를 묶어 장기 계약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가트너의 디렉터 애널리스트 린란 왕은 “데이터센터의 전력 확보가 글로벌 AI 경쟁에서 규모 확대와 수익성 유지를 위한 새로운 주전장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테크 기업에게 전력은 이제 단순히 인프라 회사에서 사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확보해야 하는 자원이 된 셈이다.
■ 왜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화력인가
탈탄소를 내세우는 빅테크가 왜 화력발전에 의존하느냐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성형 AI에는 매우 까다로운 전력 조건이 있다.
AI 모델 학습은 수천 개의 GPU를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병렬 가동하는 초대형 연산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는 단 1초도 전력 공급이 끊겨서는 안 된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ChatGPT에 질문을 한 번 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기존 구글 검색의 약 10배에 달한다.
대규모 언어모델 학습에는 추론 단계보다 훨씬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을 뒷받침하려면 날씨에 좌우되지 않는 안정적인 기저 전원이 필요하다.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 비용 하락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일조량과 바람에 따라 출력이 변동하는 한계가 있다.
대규모 배터리로 이를 보완하는 기술도 발전하고 있으나,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대규모 고신뢰 전력 공급을 현재 완전히 감당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25년 4월 보고서에서 향후 5년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분의 절반을 재생에너지가 담당할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재생에너지와 천연가스 화력이 공급 측면에서 함께 주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트너의 부사장 애널리스트 토니 하비 역시 단기적으로는 천연가스가 데이터센터의 주요 전력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석탄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천연가스 화력은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자로가 실용화되거나 대규모 저장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테크 기업들이 이상보다 속도와 안정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JERA 같은 천연가스 화력 사업자가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석유 대기업 셰브런도 2025년 1월 총 400만 kW 규모의 가스화력 사업 진출을 발표했다. 엑손모빌 역시 미국 남부에서 150만 kW 규모 화력발전소를 데이터센터와 직접 연결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 에너지 기업이 AI 인프라 기업이 되는 시대
이번 변화의 핵심은 에너지 기업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에너지 기업은 테크 기업에 전력을 공급하는 인프라 사업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느냐가 AI 개발 가능성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에너지 기업이 AI 경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뜻이다.
JERA도 이 변화를 의식하고 있다. 단순히 전력을 kWh 단위로 판매하는 기존 사업에서 벗어나, 전력과 토지, 냉각 설비를 묶은 계산 환경을 장기 계약으로 제공하는 AI 인프라 사업자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JERA의 다와 준야 부사장은 AI 데이터센터의 학습 용도에 대해 “미국에서 수요가 크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미국 사업은 이러한 전략을 구체화한 움직임이다.
일본 정부가 2026년 2월 각의 결정한 GX2040 비전도 발전소나 변전소 인근에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는 방향을 정책으로 제시했다.
지바현 인자이시를 비롯해 홋카이도와 규슈에서도 전력 인프라와 결합한 데이터센터 집적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JERA는 사쿠라 인터넷과 발전소 내 데이터센터 공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6년 2월에는 Amazon과 데이터센터용 전력 공급에 관한 기본합의서도 체결했다. 국내외에서 에너지 기업이 주도하는 AI 인프라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 AI를 잡으려면 전력부터 잡아야 한다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국제에너지기구 추산 기준 2025년 485TWh에서 2030년에는 950TWh에 가까운 수준으로 약 2배 늘어날 전망이다. 가트너는 2030년 1,200TWh를 넘어설 가능성도 제시한다. 이는 일본의 연간 총전력 소비량을 사실상 웃도는 규모다.
이 수요 증가의 상당 부분을 미국 데이터센터가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JERA가 미국 중부에 5조 을 투자하는 의미는 작지 않다. 일본 에너지 기업이 세계 AI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성형 AI 경쟁은 서버룸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력, 토지, 냉각 시설, 발전소 부지 같은 물리적 인프라가 AI 패권 경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디지털을 장악하려면 먼저 전력이라는 현실 인프라를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이 JERA의 미국 발전소 계획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