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최대 철강 업체인 포스코가 2026년 전라남도 광양제철소에 연산 250만 톤 규모의 전기로를 완공했다. 총투자액은 약 6,000억 원 규모다.
공사에는 연인원 27만 명이 투입됐으며, 한국 국내 최대 규모의 전기로 설비로 평가된다. 포스코는 기존 고로 생산 방식과 비교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대 75%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투자를 두고 탈탄소를 위한 선제적 투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실제 사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친환경 투자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유럽의 탄소 규제, 자동차용 고급 강판 경쟁, 전력 조달 문제, 철스크랩 확보 경쟁이 맞물리며 글로벌 철강업계의 판도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EU의 탄소 관세가 도화선이 됐다
포스코가 전기로 전환을 서두르는 핵심 배경에는 EU가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압박이 있다.
CBAM은 EU 외에서 생산된 제품에 포함된 CO2 배출량에 따라 수입업자가 관련 증서를 구매·납부하도록 하는 제도다. 2023년 10월 이행기간이 시작됐고, 2026년 1월 본격 적용됐다.
대상 업종은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 6개 분야이며, 유럽위원회는 2028년 이후 화물자동차와 산업기계 등을 포함해 대상 품목을 확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요약하면, 고로에서 많은 CO2를 배출해 생산한 철강을 EU에 수출하면 추가적인 탄소 비용이 부과된다는 뜻이다.
EU 시장에 의존하는 아시아 철강사들에게 전기로 전환은 환경 책임을 넘어서 유럽 시장 접근권을 지키기 위한 필수 과제가 되고 있다.
CBAM은 산업정책적 성격도 띤다. 장기적으로는 EU 내 철강 산업을 보호하면서 외국 기업에게는 저탄소화 설비투자를 강하게 요구하는 구조다.
포스코의 6,000억 원 투자는 이러한 외부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장인화 포스코홀딩스 회장이 2026년 3월 주주총회에서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도 중장기 성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힌 것처럼, 포스코는 수익 환경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미래 시장 참여 자격을 지키기 위한 선제 투자에 나선 셈이다.
■ 전기로 품질 한계 넘는 혼합 용탕 기술
전기로의 가장 큰 약점은 그동안 품질이었다. 전기로는 철스크랩, 즉 폐철을 원료로 쓰기 때문에 불순물이 섞이기 쉽다. 이 때문에 인장강도가 높은 고장력강 등 자동차용 고급 강판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 분야는 정제도가 높은 고로에서 철광석부터 일관 생산할 수 있는 일본제철, JFE 스틸 등 일본 철강사의 강점으로 꼽혀왔다.
포스코가 이번 전기로에 적용한 핵심은 혼합 용탕 기술이다. 전기로에서 생산한 쇳물과 고로에서 나온 쇳물을 적정 비율로 섞어 불순물을 희석하고 제어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고품질 강재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포스코의 설명이다.
포스코는 이 기술을 활용해 2030년까지 자동차용 강판과 전기강판 등 고부가 제품의 상업 생산을 시작하는 것을 주요 전략 과제 중 하나로 제시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공급망 전체의 이산화탄소 감축, 이른바 스코프 3 대응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라 조달하는 철강의 탄소 배출량도 발주 기준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포스코가 저탄소이면서도 고품질인 자동차용 강판을 먼저 대량 생산할 수 있다면, 일본 철강 기업이 오랫동안 지켜온 시장 우위를 한국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
■ 문제는 전기를 어디서 가져오느냐다
다만 전기로 전환의 탈탄소 효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전기로는 석탄을 직접 태우는 대신 대량의 전력을 사용한다. 문제는 그 전력을 어떤 에너지원에서 조달하느냐에 있다.
2025년 기준 한국의 전체 발전량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1.4%에 그친다. 석탄화력과 LNG 화력이 여전히 전력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60곳을 단계적으로 폐쇄한다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도 20% 수준으로 전환 속도는 완만한 편이다.
즉 제철소 내부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크게 줄이더라도, 전기로를 움직이는 전기가 화력발전에서 나온다면 배출 장소가 제철소에서 발전소로 옮겨가는 것에 그칠 수 있다.
CBAM 산정 방식은 전력 사용에 따른 간접 배출도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어, 이 문제는 포스코에도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에서 수소환원 직접제철(HyREX) 파일럿 플랜트 건설도 추진 중이며, 2028년 연간 30만톤 규모로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기적 탈탄소 의지는 분명하지만, 그린전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진정한 저탄소 철강'을 내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 세계적으로 치열해지는 철스크랩 쟁탈전
전기로의 주원료는 철스크랩이다. 과거에는 폐자재에 가깝게 여겨졌던 이 자원이 탈탄소 흐름 속에서 도시광산의 전략 물자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각국 철강사가 전기로 전환에 속도를 내면서 철스크랩 수급은 빠듯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2026년 일본 내 시장에서도 도쿄제철이 2022년 5월 이후 약 4년 만에 전 품목 가격 인상에 나서는 등 원가 상승 압력이 현실화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의 위치다. 일본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적인 철스크랩 수출국이다.
고로 의존도가 높은 생산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폐철 발생량은 많다. 이 구조에서 생기는 수출 여력이 한국과 동남아시아 등으로 흘러가고 있다. 2026년 1~4월 누적 기준 한국으로 향한 수출량은 35만 톤에 달했다.
포스코의 대형 전기로가 본격 가동돼 수요가 늘어나면 한국 측의 매입 가격도 오를 수 있다. 이는 일본 철스크랩 시세 전반을 끌어올리고, 일본 내 전기로 업체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이 수출한 철스크랩이 한국 경쟁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동시에 일본 전기로 업체의 원가를 압박하는 역설적인 구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 CBAM 대응을 의식한 국제 시장에서는 철스크랩의 출처와 제조 이력을 증명하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단순히 싸고 많이 확보하면 되는 시대가 끝나고, 품질과 추적 가능성이 중요한 새로운 조달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시험대 위에 오른 것은 '비용과 자원의 현실성'
포스코의 6,000억 원 전기 설비 투자는 철강업의 탈탄소 경쟁이 본격화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투자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환경 배려를 넘어서, 유럽 규제에 대응하고 고부가가치 시장에 진입하려는 두 전략적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 앞길에는 두 가지 구조적 난제가 가로놓여 있다. 그린전력의 부족과 전 세계적으로 심화하는 철 스크랩 쟁탈전이다. 이 문제들은 한 기업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고, 국가의 에너지 정책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직결된다.
탈탄소가 '목표로서 옳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과 자원 제약을 외면하면 현실적인 비즈니스 리스크를 오판하게 된다. 포스코의 전략적 도전은 글로벌 산업 경쟁의 구조 변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 연구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