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루카리가 OpenAI의 ‘Apps in ChatGPT’에서 공식 앱 제공을 시작했다. 이제 사용자는 ChatGPT에서 대화만으로 메루카리 상품을 검색하거나, 상품 설명글 초안을 만들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검색 기능의 확장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다. 중고거래 앱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AI로 풀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8할이 하나뿐인 상품’이라는 중고거래의 난제
중고거래 앱의 본질적인 어려움은 상품이 정형화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메루카리에 따르면 출품 상품의 약 80%는 모델명이나 상품 코드 같은 기존 카탈로그와 연결하기 어려운 ‘하나뿐인 상품’이다. 이 때문에 구매자는 어떤 키워드로 검색해야 할지 막히기 쉽고, 판매자는 설명글에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Amazon이나 Rakuten 같은 1차 유통 전자상거래는 카탈로그 데이터와 가격 비교를 바탕으로 검색 경험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중고거래 앱은 같은 상품처럼 보여도 판매자, 상태, 가격이 모두 다르다. 사용자가 무엇을 사야 할지 명확히 정하지 않은 채 앱에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메루카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외부 대규모 언어모델과의 깊은 연동이다.
예를 들어 “예산 5000엔으로 캠핑용품을 찾아줘”, “축구를 좋아하는 유치원생 남자아이의 생일 선물을 찾아줘”처럼 원하는 상품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담도 AI가 문맥을 읽고, 약 2300만 명의 고객이 출품한 상품 가운데 적절한 후보를 제안한다.
경제 저널리스트들은 “중고거래 앱에서 AI 도입의 첫 번째 의미는 검색 이탈 방지”라고 지적한다. 키워드가 떠오르지 않아 앱을 닫는 사용자를 대화로 붙잡을 수 있느냐가 구매 전환율과 구매 빈도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메루카리가 ChatGPT와 손잡은 것은 단순한 UI 개선이 아니다. 구매의 입구를 자사 앱 바깥, 즉 ChatGPT로 넓히는 전략이다.
사용자가 ChatGPT에서 쇼핑 상담을 하는 순간, 메루카리가 자연스럽게 구매 후보로 떠오르는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다.
■ 기술 기반 ‘Mercari MCP’가 의미하는 것
이번 연동을 뒷받침하는 것은 메루카리가 2026년 1월 공개한 ‘Mercari MCP’다. MCP는 외부 AI 서비스가 메루카리 기능을 안전하게 호출할 수 있도록 하는 표준화된 구조다. 이번 ChatGPT 연동은 그 첫 본격 활용 사례다.
메루카리는 앞으로 ChatGPT 외 다른 AI 서비스로도 연동을 넓히고, 대응 기능을 확대할 계획이다.
MCP는 AI 업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표준 프로토콜이다. 메루카리는 이를 자사 서비스의 연결 기반으로 정비해, ChatGPT뿐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여러 AI 에이전트와도 연동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다.
특정 AI 플랫폼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고, 어떤 AI 서비스에서도 “중고거래라면 메루카리”가 호출될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선택이다.
이번 시도는 단발성 기능 추가가 아니라 회사 내부의 조직 변화와도 연결돼 있다. 메루카리는 2025년 7월 약 100명 규모의 ‘AI Task Force’를 만들고, 전사 업무 영역을 점검하며 AI 도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약 반년 만에 ChatGPT, Claude, Notion의 AI 기능이 전 직원에게 보급됐고, AI 도구 이용률은 100%에 도달했다. 엔지니어 1인당 개발량은 전년 대비 1.9배 늘었으며, 현재 작성되는 코드의 약 70%가 AI로 생성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6월 1일자로 최고기술책임자였던 기무라 도시야가 최고인사책임자와 최고AI책임자를 겸임하게 됐다. AI 전략과 인사 전략을 한 사람이 함께 맡아,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승인 절차, 조직 구조, 자원 배분을 AI 중심으로 다시 설계하려는 움직임이다.
AI 도구를 쓰는 회사를 넘어, AI를 전제로 조직 자체를 재설계하는 회사로 바뀌려는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 경쟁사는 아직 판매자 지원 중심
경쟁사의 AI 활용은 아직 방향이 다르다.
Yahoo! 프리마는 2023년 8월부터 상품명과 카테고리를 입력하면 생성 AI가 상품 설명글을 제안하는 기능을 제공해왔다.
새로 도입된 ‘간편 AI 출품’에서는 상품 사진 1장만으로 제목, 상품 설명글, 상품 상태 등을 생성 AI가 작성하도록 돕고, 판매 가격도 제안할 수 있다.
사진을 보내면 시세를 알려주는 ‘간편 AI 감정’ 기능도 LINE 공식 계정과 앱에서 제공하고 있다.
이 기능들은 실용성이 있지만, 핵심은 판매자의 작업 효율화다. 반면 메루카리가 이번에 내세운 것은 구매자의 쇼핑 경험 자체를 AI로 다시 설계하는 접근이다.
판매자 지원 AI는 기존 사용자의 이탈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신규 사용자 확보나 구매 빈도 향상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메루카리가 파고든 구매자 경험의 AI화는 중고거래 시장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기술 구조에서도 차이가 있다. Yahoo! 프리마의 AI 감정 기능은 Google Cloud의 Vertex AI와 Gemini API를 활용한다. 구글 AI 기반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반면 메루카리는 자체 MCP를 정비해 특정 업체에 묶이지 않고 여러 AI 서비스와 연결할 수 있는 범용 기반을 만들고 있다. 이 연결 설계의 차이가 앞으로 기능 확장 속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 검색 로그에서 대화 로그로
비즈니스 전략 측면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데이터의 질 변화다.
기존 키워드 검색 로그가 “Nike 운동화 26cm”처럼 브랜드와 사양 중심의 정보를 보여줬다면, 대화 로그는 더 풍부한 맥락을 담는다.
예를 들어 “주말에 처음 캠핑을 가는데 최대한 싸게 장비를 맞추고 싶다”는 대화에는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 행동 목적, 예산, 시기 같은 구매 의도가 포함돼 있다.
디지털 마케팅에서 이런 맥락 정보의 가치는 단순 검색어보다 훨씬 크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 관점에서 데이터 활용에는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집계·익명화된 트렌드 데이터로 활용한다면, 판매자에게 수요 정보를 제공하거나 광고주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등 수수료 외 수익 모델로 확장될 여지도 있다.
다만 현재 메루카리가 데이터 비즈니스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공개한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 AI 중심 기업 선언의 의미
메루카리의 기무라 최고기술책임자는 제품, 일하는 방식, 조직 전체를 AI 중심으로 재구축하고 AI의 진화를 최대한 활용해 이전에 없던 성과를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2026년 6월기 메루카리는 GMV 성장률 3~5%, 핵심 영업이익 320억~360억 엔을 예상하고 있다. 2027년도 이후 성장을 위한 기반 구축 단계라는 설명이다.
GMV 성장이 완만해진 상황에서, 메루카리는 AI를 다음 성장의 기폭제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ChatGPT 연동은 그 기반 중 하나다. AI와의 대화가 상품 탐색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흐름 속에서, 메루카리는 해당 생태계에 일찍 들어가 사용자의 습관 변화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메루카리의 ChatGPT 연동은 단순한 기능 추가가 아니다. 외부 AI 플랫폼과 연결되는 MCP 기반, 전사 AI화 조직 체계, 구매자 경험의 재설계가 맞물린 포석이다.
Yahoo! 프리마나 Rakuten 라쿠마도 AI 기능을 확대하고 있지만, 현재는 판매자 지원 중심이다. 구매자가 상품을 찾는 과정을 AI로 바꾸는 영역까지는 아직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앞으로의 쟁점은 사용자가 AI로 중고품을 찾는 습관을 얼마나 빠르게 익히느냐다. ChatGPT 안에서 메루카리를 쓰는 경험이 일상화된다면, 중고거래 시장의 경쟁축은 크게 바뀔 수 있다.
중고거래 앱의 경쟁은 이제 단순히 상품 수나 수수료만의 싸움이 아니다. 누가 사용자의 ‘구매 전 대화’를 먼저 잡느냐가 새로운 승부처가 되고 있다.











